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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내용 찬찬히 살펴보니…
2008.12.18 인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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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교육과학기술부가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6종에 대한 최종 수정안을 발표했다. 그 동안 교과서 수정 권고를 놓고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가장 중요한 문제는 수정한 내용이 어떤지 여부다. 비판론자들이 주장하는 것만큼 이번 근현대사 교과서 내용의 일부 수정이 문제가 될 만한 것인지 찬찬히 살펴보자. 과연 그 내용이 학계나 학교 현장에서 비판을 쏟아낼 문제인가. 과연 교과서 정상화의 취지를 벗어난 것인가.

내용을 보자. 가장 수정할 내용이 많아 자주 언급됐던 금성교과서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신미양요와 병인양요를 다룬 48쪽에서 프랑스 함대의 ‘진로’, 미국 함대의 ‘침입로’로 돼 있던 부분을 ‘침입로’로 통일시켰다.

또 52쪽에선 “조미수호통상 조약도 강화도 조약과 같이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영사 재판권에 의한 치외법권은 물론 최혜국 대우까지 규정돼 있어서 미국은 장차 더 큰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다만 강화도 조약과 달리 비율은 낮지만 관세조항이 들어있었다” 부분에서 “미국은 장차 더 큰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는 부분을 빼고 “~규정돼 있었다. 다만 강화도 조약과 달리~”식으로 변경했다.

광복을 다룬 253쪽에선 “연합군이 승리한 결과로 광복이 이루어진 것은 우리 민족 스스로 원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는 부분을 “우리의 힘으로 일본을 물리치지 못한 것은 통일 민족 국가를 건설하는 데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로 수정했다.

256쪽에선 “일장기 대신 올라간 것은 태극기가 아니었다. 일장기가 걸려 있던 그 자리에 펄럭이는 것은 이제 성조기였다. 광복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역사적 순간은 자주 독립을 위한 시련의 출발점이기도 하였다”는 부분을 “~이제 성조기였다. 자주 독립 국가가 시작된 것은 아니었지만, 광복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로 내용을 수정했다.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의 모든 권한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 시행한다’는 맥아더 미 육군 총사령관의 포고령 1호와 ‘조선인민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여러분들 수중에 있다. 여러분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는 치스차코프 소련군 사령관 포고문을 다룬 257쪽에선 포고령과 포고문 뒤에 각각 “미군의 포고령은 군정 설립이라는 현실적 상황에 직면하여 한국인에게 주의 사항을 전달한 것이다”, “소련의 포고문은 그들의 이념을 선전하기 위해 고도의 미사여구를 구사한 선동수단에 불과한 것이다”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북한의 토지개혁을 다룬 322쪽에선 “이렇게 몰수한 토지는 ‘토지는 밭갈이하는 농민에게’라는 원칙에 따라 고용농, 토지가 없는 농민, 토지가 적은 농민에게 나누어 주었다”라는 과거 내용에 더해 “분배된 토지의 매매, 소작, 저당은 금지되었으며 생산된 양곡의 1/4 정도를 현물세로 납부하였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정부 수립을 다룬 261쪽에선 “이승만은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중단되자 곧바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는 부분에서 “곧바로”라는 단어를 빼고, “남한에서 정부가 세워진다면 이는 북한 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질 것이 확실하였다. 이제 남과 북은 분단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라는 부분을 “유엔 소총회의 결의로 마침내 우리 민족의 정부가 세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통일 정부 수립이라는 희망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는 내용으로 수정했다.

263쪽에선 “김구의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내용 이후에 김구와 김규식이 1948년 4월 19일부터 30일까지 평양에서 북의 김일성, 김두봉과 가진 남북 정치 지도자 회의를 설명하고 “남북 협상에 대한 평가는 정파에 따라 다르다. 5·10 선거에 참여해 정부를 수립했던 이승만-한민당 입장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남북 협상이 초대받은 잔치에 들러리만 선 것으로 평가한다. 반면 이 협상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비록 이 운동이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이후 통일운동의 한 지침을 제공했으며, 한국인의 통일 의지를 발산시킨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265쪽 “북한은 1946년 2월부터 ‘민주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일제의 식민 지배를 청산하고 사회체제를 바꾸는 일련의 정책을 시행하였다”는 부분을 “북한은 1946년 2월 실질적인 정부기능을 하는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를 만들고, 이른바 ‘민주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일제의 식민 지배를 청산하고 사회 체제를 바꾸는 일련의 정책을 실시하였다”로 수정했다.

266쪽 ‘좌절된 친일파 청산’ 부분에선 “민족정신에 토대를 둔 새로운 나라의 출발은 수포로 돌아갔다” 부분을 “이로 인해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한 친일파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끝나고 말았다”로 바꾸고, 같은 쪽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과오는 우리 현대사를 옥죄는 굴레가 되었다”는 부분을 “우리 민족은 친일파 청산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로 수정했다.

미국의 원조를 다룬 325쪽에선 “이승만 정부는 부족한 재정을 메우고 정치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의 잉여농산물을 필요 이상으로 들여왔다”는 부분을 “이승만 정부는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미국의 잉여농산물을 들여왔고, 그 중 일부는 정치 자금으로 이용되기도 했다”고 바꿨다.

271쪽 휴전을 반대하던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을 기술한 부분에선 “휴전 협정 자체를 무산시킬 수도 있는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부분을 “‘전시 포로의 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정’을 위반한 사항으로 휴전 협정 자체를 무산시킬 수도 있는 사건이었지만”으로 수정했다.

민간인 학살을 다룬 272쪽에선 “후퇴하던 북한군도 대전 등지에서 많은 주민을 죽였다” 부분을 “후퇴하던 북한군도 대전, 전주 형무소 등에서 많은 주민을 죽였다”로 좀더 구체화했다.

수출주도 경제를 다룬 32쪽에선 “수출 위주의 경제 발전은 지나친 서구 중심의 정치·외교 활동은 제3세계 국가들과 대립을 불러일으켰다”를 “수출 중심의 경제 발전은 대외의존도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서구 중심의 정치외교 활동으로 제3세계 국가들과 관계가 상대적으로 멀어지게 되었다”고 수정했다.

새마을 운동을 다룬 334쪽에선 “새마을 운동은 겉으로는 민간의 자발적인 운동이었으나, 실제로는 정부가 주도하였다. 그 결과 박정희 정부의 독재와 유신체제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다”를 “새마을 운동은 겉으로는 민간의 자발적인 운동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부가 주도하여 박정희 정부의 독재와 유신 체제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기도 하였다”고 바꿨다.

북한의 주체사상을 다룬 306쪽에선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이후 심각한 경제난을 극복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하면서 주체사상에 대한 북한 주민의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는 설명을 추가했다.

북핵을 다룬 314쪽에선 “1990년대 전반 막대한 군사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의혹이 국제 사회에 제기되었다”는 기존 서술내용에 “북한은 핵확산 금지 조약 탈퇴를 선언하고, 핵무기 보유를 일방적으로 선언함으로써 한반도와 국제사회에 불안과 긴장을 증폭시켰다”는 설명을 추가했다.

316쪽 통일과 관련한 부분에선 “근래 통일에 대한 기대감은 어느 때보다도 높아지고 있다”는 부분을 “1990년대에 냉전 체제가 무너지면서 한반도의 주변 정세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 평화통일을 위한 여건이 점차 호전되고 있다”로 수정했다.

대충 주요한 수정내용을 살펴봤다. 역사, 그 중에서도 근현대사를 기술하는 데는 역사가나 학파마다 다양한 입장과 해석이 있을 수 있다. 특히 2002년부터 국정교과서 체제에서 교과서검정체제로 바뀐 이래 근현대사 교과서 기술은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보편적인 역사기술을 위해 교과서 정상화를 요구하는 것은 미래 세대에 대한 우리사회의 중요한 책무인 셈이다.

*이번에 수정된 206곳의 구체적인 변경 내용은 첨부파일을 확인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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